목회칼럼

Jesus Love Church Pastor Column

20180916/ 오치용 목사/ 영원히 남는 관계

Author
admin
Date
2018-09-17 16:44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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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남는 관계

오치용 목사

지난 목요일 저녁에 에녹이와 식사를 하기 위해 한 식당엘 갔습니다. 갑자기 떠나게 된 에녹이에게 밥 한 끼 사주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친구들을 떠나 보냈으니 이제는 이별이 익숙해질만도 한데 여전히 그렇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오래 있을 거라 생각한 친구가 하루 아침에 떠나니 더 충격이 컸습니다. 이별이 마음에 상처가 되어 쌓이는 느낌입니다. 식당에 들어갔는데 바로 앞 테이블에서 학생들이 인사를 합니다. 민석이네 조 네 명이 밥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동시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친구들도 인사를 하는데 진우네 조 밥조인 듯 했습니다. 양쪽으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더니 이번엔 옆 테이블 사람들이 인사를 합니다. 보니까 한나네 조 네 명도 밥조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우연이 있을까 신기해 하면서 서로 한참을 웃었습니다. 같은 시간 한 식당에 우리 교회 친구들만 열서너 명이 있었던 겁니다. 새로운 얼굴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다들 애쓰고 있구나 싶어서 흐뭇했습니다. 만남과 이별이 한 장소, 같은 시간에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삶은 사람의 준말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분자와 분모를 약분하면 ‘삶’이 된다는 거지요. 우리의 삶이 사람들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 상처는 사람들에 의해서 치유되기도 합니다. 희로애락, 기쁨과 분노와 슬픔과 즐거움이라는 살면서 겪는 다양한 감정들을 우리는 서로 주고받습니다. 지나고 보면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경험이다 싶지만 할 수 있는 한 좋은 관계들을 맺으며 살고 싶은 게 모두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관계는 많은 경우 비틀어져 있습니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이것을 ‘나와 너’, ‘나와 그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나와 너’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나와 그것’은 사람을 수단과 도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많은 관계들이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대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삼으면서 비틀어져 있습니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서로를 메마르게 할 뿐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서로를 공평한 입장에서 바라보고 그 사람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대부분의 관계들은 어떤 목적 아래에서 맺어집니다. 학생과 선생은 가르침을 주고 받는 목적 아래에서, 가게 주인들과 손님들은 물건을 사고 파는 목적 아래에서 관계가 맺어집니다. 심지어 저와 여러분들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원하는 목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관계가 맺어지는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기독교 신앙은 이런 목적들을 뛰어 넘어 관계를 맺게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신 기적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기적보다 사람들의 영혼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 더럽고 흉한 상처들을 거리낌없이 어루만지신 예수님의 손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기적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사랑은 우리로 목적과 기능을 넘어 사람 자체에 주목하게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은 오직 ‘나와 너’로 만날 때뿐입니다. 그런 관계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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